11월 29, 2023

왕의 후예 | 율왕 이길수 형님과 밤실의 추억

‘밤실’은 법정리 석적읍 ‘남율리’의 구전되는 순수한 우리말 이름이다. 서쪽 낙동강을 경계로, 경부고속국도 왜관낙동강교 동남쪽 반경 4km를 아우르는 4.2㎢(1,270,500평) 규모의 자연마을이며, 2000년 남율 1~5리로 구획 편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밤실’ 이름의 유래는, 조선 선조 때 조정의 모함으로 낙동강 갯벌에 유배 중이던 직산공(稷山公)에 의해, 일대의 무성한 갈대밭에 밤나무가 심어진 여파로 마을 전역이 울창하게 밤나무 숲으로 우거진 데 있으며, 1637년 무렵 입향하고 정착한 전주이씨 집성촌으로 유명하다.

지금은 흔적조차 없지만, 유년 시절 외가에 갈 때마다, 울창한 밤나무 숲과 강변 언저리 외딴 외가가 있는 과수원으로 연하는 길로, 승마복을 입고 말달리던 인근 미군기지 장교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태초처럼 청정하고 정갈하게 굽이치는 낙동강은, 소년의 마음조차 관수세심(觀水洗心)을 느끼게 하였다. 옥같이 푸른 강물로 침잠한 금빛 모래알과 진흙이 서로 버무려져, 비옥해진 갯벌 외가의 과수원에는 사과나무가 주를 이루었지만, 복숭아와 천도복숭아, 수박과 참외, 땅콩 등 일상의 자급자족을 위한 사철 과일과 채소가 노지에 풍성하게 총망라 재배되어 천국을 방불케 하였다. 나라 전체가 가난과 궁핍으로 찌들어, 하루 세끼 밥도 해결하기 어려웠던 시절이었기에 더욱더 그랬다.

참외와 수박의 달콤한 냄새가 어우러져 등천하고, 청둥오리가 노니는 낙동강 강변의 정취와 풍광은, 흘러간 강물처럼 산업화로 이젠 사라졌지만, 그곳의 기억 저편에는 항상 자애로운 외할머니의 모습과 함께 희망과 그리움이 오로라처럼 피어오른다.
비틀즈( Beatles)의 ‘렛잇비(Let It Be)’ 노래 속 수녀님처럼, 고통과 번민의 시간에는 언제나 어김없이 다가오셔서, “걱정하지 말아라, 할미가 있다. 인간만사 새옹지마이니라, 안되면 집 팔면 된다. ”라는 어려운 가정형편에 대한 외할머니의 위로 말씀은, 어린 마음속 깊이 각인되고 평생의 좌우명이 되어 ‘렛잇비(Let It Be)를 늘 애창하는 계기가 되였다.

외사촌들과 바둑을 즐기시던 외숙부, 부지런하시고 항상 인자한 미소를 머금으시던 자그마한 체구의 외숙모, 사과나무 아래 세라복(세일러복, sailer)을 입고 자태를 뽐내던 아름다운 막내 이모, 동갑내기 외사촌과 더불어 종횡무진으로 내달리던 밤실 아이들과 소먹이던 ‘엄마소골’, 탱자나무 울타리 사이로 쿵쾅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장난삼아 행하던 사과 서리의 아련한 추억은, 한여름 내내 원두막을 누비던 푸른 바람처럼 애타는 그리움과 사무쳐 눈시울이 뜨겁다. 외가에 갈 때마다 항상 나를 ‘도련님’으로 부르던 정 씨 아저씨의 모습도 그립다. 정 씨 아저씨는 북한에서 홀로 월남하여 외가에 기거하면서, 외가의 대소사를 돕던 집사 역할을 하시던 분이다.

두 번 다시 못 올 시공(時空)에 아롱진 추억의 화룡점정은 외사촌 길수 형님이다. 세종대왕의 제8 왕자 영응대군 이염(李琰)을 파조(派祖)로 하는 왕손 길수 형은, 항상 남을 배려하고 베풀기 좋아하는 어진 성품이, 세종대왕의 총애를 받던 영응대군의 기지와 호쾌한 기품을 빼닮아 왕손으로 손색이 없다. “우리 길수 조카는 사람이 좋아 팔도에 친구들이 수두룩하다”라고, 수줍은 웃음을 머금은 채 늘 자랑하시던 생전 어머니(고모) 모습이 새삼스럽다. 어머니는 통학 거리 때문에, 왜관 우리 집에서 대구에 있는 대학교에 다니던 길수 형를 위해 여러 해 동안 새벽밥을 지으셨다.

60여 년 전 어느 해, 외가에서 돌아오던 날, 낮잠을 자다가 벌떡 일어나, 벽에 걸린 바지 호주머니를 몽땅 털어서, 고종사촌 동생인 어린 나에게 용돈으로 주던 정겨움은, 금마산 자락 모퉁이 비포장 신작로(67번 국도) 뽀얀 흙먼지 속으로 달려오던 왜관행 버스의 무정한 야속함에 솟구치는 울음을 삼켜야 했다. 대학진학 선물로 받아 신은 분홍신표 뾰족구두와 한 학기 등록금에 해당하는 큰 용돈은, 숙명적인 혈연을 초월하는 고매한 인간애가 근간이 되는 연민의 정으로 여겨져 도저히 잊히지 않는다.

에필로그

길수 형님에게 근사한 차 한 대 뽑아드리는 것이 소원이다. 형님처럼 물욕없이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며 살아서 가진 것이 별반 없으며, 이미 덧없이 황혼이 짙게 드리워지고 있고, 탐탁하지 않은 것이 인생이지만 마음만은 현재진행형이다. 비로소, 안빈낙도와 “공수래공수거”는 소인배의 소양으로 여겨지고,‘빌 게이츠’나 ‘마크 저커버그’ 그들 역시 빈손으로 돌아갈 것이나, 엄청난 나눔의 위대한 빛과 존경은 그들의 손에 영존할 것이다. 그들처럼 살아보고 싶지만, 다음 생을 줄지는 의문이다.
칠곡군의회 부의장 역임과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결코, 소진하지 않을 애민정신에 존경과 감사를 드리며, 외가에 머문 시간이 턱없이 짧으나, 인생 전반의 기억보다 크게 자주 뇌리를 엄습하는 ‘밤실’ 추억 소고를 마친다. 모든 전주이씨 종친이 그러하듯이, 나 역시 어머니를 통해 왕의 피를 할애받았다는 뿌듯한 자부심과 제왕의 품격에 걸맞은 처신을 위한 지침으로 간략한 밤 실 전주이씨 계보를 피력한다.

영응대군

영응대군은 세종대왕과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 사이에서 여덟 번째 아들로 태어나, 문종을 큰형, 세조를 둘째 형으로 둔 왕족이다. 글씨와 그림에 능하고 음률에도 통달하였으며, 『명황계감(明皇誡鑑)』의 가사를 한글 번역도 했다.
명황계감은 1441년에 세종대왕이 편찬한 규범 책으로, 미색에 탐닉하다가 정사를 등한시하여, 나라의 패망을 자초한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의 행태를 경계하기 위함이다.

정부인 '대방부부인' 송씨와 두 번째 '춘성부부인' 해주 정씨 사이에는 아들이 없었지만, '연성부부인' 김씨를 세 번째 부인으로 맞이하여, 외동아들 청풍군(靑風君) 이원(李源)과 손자 화림군(花林正) 이단(李檀), 증손자 흥고도정 이경천(李敬千), 현손 의곡 이빈(李馪)의 계보로 이어지던 중,
5대손 수헌 이선술(李善述)이 병자호란을 기화로 인동 율리(밤실)에 낙남하여 밤실 세거성씨 전주이씨 입향조가 된다.

양지마, 음지마, 샛터, 강촌의 집단 주거지로 구성된 ‘밤실’의 북쪽은 경마산, 동쪽은 골미산, 남쪽은 군바위산, 서쪽은 낙동강을 경계로 하는 아름다운 자연마을이다.
‘밤실’에 정착한 수헌공은, 인동 출신 유학자 여헌 장현광 선생의 두터운 교분과 도야한 깊은 학문으로 지역 선비들의 추앙을 받으면서, 종훈 숭조돈종(崇祖惇宗) 정신(精神)을 부단히 실천하여 후손들이 문과, 무과에 합격하였고, 칠곡군 석적면, 약목면, 대구, 평택 안중, 서울 등 전국 각지에서 살며, 각계 각층에서 활동하고 있다.

태조 이성계 1335~1408
태종 이방원 1367~1422
세종 이도 1397~1450
영응대군 이염 1434~1467
1대 청풍군 이원 1460~1504 흥록대부 국무총리
2대 화림군 이단 1485~1551 명선대부 1급
3대 흥고도정 이경천 1521~? 창선대부 1급
4대 의곡 이빈 1550~1610 숭정대부 부총리
5대 수헌 이선술 1589~1641 통훈대부 1급
밤실 할아버지
밤실 할머니 11월 24일 10월 12일

용어해설

노소를 불문하고 역사서를 읽을 때 사람의 이름 때문에 혼동을 초래하여 흥미를 잃기 일쑤이나, 알고 보면 간단하다. 호는 이름 대신 쓰는 별칭으로, 오늘날 인터넷 계정의 아이디와 같은 것이다. 부모, 스승이나 스스로 부여하는 호가 있고, 왕자 · 외척 · 공신에게 나라에서 부여하는 공 · 후 · 백 · 자 · 남의 작위도 있다. 주로 지명을 사용하나, 자연물 등을 소재로 2자가 보편적이며, 이상일 경우도 많이 있다.

흥의재

흥의재는 영응대군 3대손 흥고도정공(興古道正公), 4대손 의곡공(義谷公)의 추모를 위해 후손들이 모금하여, 1983~1987년에 걸쳐 경북 칠곡군 석적면 남율로6길 16-26에 신축하고 흥의재(興義齊)라 명명하였다.
흥의재(興義齊)는 “항상 옳은 일을 도모하여, 사람의 도리를 실천하는 집”이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무방하다.

흥의재 지도 보기

이로재

밤실 입향조 영응대군 5대손 수헌공(隨軒公)을 추모하기 위해, 1939년 후손들이 돌미산 아래인 경북 칠곡군 석적읍 성곡1길 50에 건축한 재실이다.

편액한 이로재(履露齊)는 ‘이슬을 밟는 집’이란 뜻으로, <소학(小學)>에 소개된 선비가 노부가 입을 겉옷을 미리 따뜻하게 할 요량으로, 새벽 일찍 낭자한 이슬을 밟고 노부의 처소로 가는 것처럼 효를 행하겠다는 후손의 의지가 내포되어 있다.
편액은 널빤지나 종이 · 비단에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려 대문 위에 거는 액자를 말한다.

이로재 지도 보기

종친회 홈페이지

전주이씨의 계보는 국가 차원에서 작성된 사료에도 많이 언급되어 있다. ‘화림정’은 ‘화림군’, ‘흥고부수’는 ‘흥고도정’으로 종친의 결의에 따라 2015년경 변경되었다. 통일성을 기하려면 각급 기관에 수정을 의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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