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4, 2025

여정의 인연과 그리움 | 못 잊을 노래와 함께

자고산 연가

원대한 꿈을 머금고 자고산을 맴돌던 아이들, 광규, 달수, 수권, 종호, 종화, 종희, 창기가 바야흐로 칠순이 되었다. 그 시절, 자고산 자락을 굽이치던 물빛 푸르던 낙동강, 아이들처럼 그 모퉁이들을 거닐던 구상 시인은 세상의 큰 빛을 남기고 이미 떠났다.
세상의 큰 빛은 되지 못했지만, 아이들은 달빛을 먹고 사는 고상한 자고새를 닮아, 세상을 착하고 아름답게 음유하며 살아 아이들의 우정이 회자 되었다.
이제 새벽도 없는 밤을 향해 황혼은 짙어 오지만, 사소하고 부질없는 욕심과 회한에 연연하지 않고 변하지 않는 동심(童心)은, 황혼의 외로움과 불안을 밝혀 줄 것이 분명해 보인다. 늙으면 다시 아이가 되고, 여생도, 지금껏 하던 것처럼 무탈하고 순탄한 여정이 되도록, 행운의 여신이 도와줄 것이기 때문이다..

청년의 아름다운 외침

비가 잘 오지 않기로 소문난 대구에도 아침부터 장맛비가 내리고 있었다. 코로나 때문에 두문불출하다가, 조카 손자에게 과잣값이라도 주고 올 양으로 길을 나섰다. 3살 때부터 매주 수요일은 빠짐없이 만나, 사우나와 놀이공원 등을 전전하면서 소일하다가, 코로나 때문에 완전중단한 상태였다. 이곡사거리에서 신호대기 중에, 누군가가 조수석 창문을 두드려서 차 문 유리를 열어보니, 예쁘장하게 생긴 청년이 “자동차의 주유구가 닫히지 않았어요. ‘라고 외치면서 제법 세찬 비속에 서 있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채 하기도 전에 신호가 바뀌고, 그 청년도 자신의 승용차에 승차하고 떠나 버렸지만, 차창을 때리는 빗줄기처럼 청년의 아름답고 세심한 배려가, 손자를 만나는 동안 내내 가슴을 뭉클하게 적셨다. 권선징악을 일상의 지침으로 살아온 우리를 따돌리고 지붕 위로 달아나, 명실공히 문재인 시대를 빛내고 있는 무리 때문에, 청년의 향기는 더욱더 맑고 싱그럽게 느껴졌다.

논산훈련소의 세레나데

1980년 논산훈련소 야외훈련장의  오월은 뜨거웠다. 또래들보다 3년 늦게 입대한 이유 때문인지 몰라도 유달리 힘겨웠던 기억이 새롭다. 힘겹고 고단한 오전 훈련과정을 마치고, 야외훈련장에서 배식받은 점심의 맛이 꿀맛을 초월한다는 것은, 현역 복무를 마친 분들의 한결같은 지론일 것이다. 그날은, 배식받은 많은 훈련병이 소속 중대와 구분 없이 야산 공터에서 다 같이 식사 하는 도중이었는데, 전혀 모르는 훈련병 한 명이 내게로 다가와서 ‘밥 더 먹어’라는 짧은 말과 함께 상당량의 자기 밥을 내게 나누어 주었다. 제대 후 또렷하지 않게, 그 당시의 상황과 훈련병의 모습만 아련하게 간헐적으로 떠 올랐지만, 밥을 나누어준 이유에 대해서는  최근까지 단순히 입맛이 없었던 것으로 치부해 버렸다.  진정한 나눔은 적은 것일수록 진가가 있다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말이다. 유달리 지친 나의 모습에 대한 연민의 정으로 베풀어준, 이름도 모르는 훈련병의 숭고한 나눔을 이해하지 못한 회한으로 밤잠을 설치기가 일쑤인 것은 조카 손자에  대한 조건 없는 그리움과 사랑의 발로 때문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희생을 수반한 나눔이야  말로, 진정한 기쁨이자 인간이  가야 할 길임을 깨닫게 해준 이름도 모르는 병사가 새삼 몸서리치게 그리워지는 밤이다.

풍기 파리바게뜨

퇴직 후 세 번째 방문한 풍기! 언제나 당당하고 안온한 소백산 자락에 자리한 풍기읍은 늘 정감이 넘쳐흘렀다. 무더운 날씨 관계로 산림욕 숲속에서 하던 색소폰 연습은 접어 두고 인근 온천에서 사우나를 마친 뒤, 풍기읍에 소재한 파리바게뜨에 들러 시원한 팥빙수를 먹고 있는데, 키가 크고 미모가 출중한 젊은 여인이 세 명의 아이를 데리고 들어와 옆자리에 앉았다. 아이들은 하드 한 개씩을, 여인은 녹차 주스를 마시면서 우리와 최근 유아 복지 지원 등에 대해서 담소를 나누었고, 아이들은 이내 하드를 다 먹어 버리고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여인의 인사말을 뒤로하고 파리바게뜨를 나와 승차 후 출발하려고 전방을 주시하자, 언제 나왔는지 그 젊은 여인이 두 아이와 함께 유모차를 밀면서 풍기역 쪽으로 가고 있었다. 순간 묘한 연민의 정으로 형용할 수 없는 서글픔이 수치심과 함께 솟구쳐 올라 운전할 수가 없었다. 여인과 아이들이 파리바게뜨에서 왜 서성거렸는지를 미처 느끼지 못한 점과 아이들의 해맑고 염원에 찬 눈동자와 여인의 긴 목덜미가 왜 그리 슬퍼 보였는지, 대구로 오는 내내 씁쓸한 기분을 접을 수가 없었다. 또다시 만나게 되면 아이들에게 실컷 빵을 사줄 양으로, 노란 은행잎이 뿌리던 그해와 이듬해 가을, 다시 풍기 파리바게뜨를 맴돌았지만,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