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심 대백과
순심
순심ㆍ純心ㆍSunsim은 성베네딕도 왜관수도원이 운영하는 사학재단의 이름입니다. 1946년 5월 23일에 개교한 초급여자중학교의 이름에서 유래되었으며, 이는 프랑스인이자 왜관성당의 주임신부인 이 로베르토 신부에 의해 1936년에 설립된 사설강습소인 소화여자학원이 그 전신이 됩니다. 이후 발전을 거듭하여 설립된 순심교육재단 산하에 순심고등학교와 순심중학교 그리고 순심여자고등학교와 순심여자중학교로 분리 확장되어 2021년 현재까지 지속적인 명문사학으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순심ㆍ純心ㆍSunsim의 뜻은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영문표기가 원래는 ‘SunShim’이었으나, 2000년도에 영어표기법을 이유로 'Sunsim'으로 수정하였습니다. 원래의 영문이름은 두 개의 단어로 구성되었다는 견해와 지속적인 사용의 주장에 무게가 실립니다. 왜냐하면 Sun(태양)과 Shim(틈을 메우는 쇠)을 조합하여 풀이하면 아주 훌륭한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즉, 'SunShim'은 빛의 근원인 태양의 균열을 막아주는 요긴한 존재임을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순심 마크는, 비례, 균형, 통일 요소가 충분히 가미된 심미성과 단체의 이념과 정체성ㆍIdentity이 상징적으로 잘 표출되어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손색이 없다는 각계각층의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 순심고등학교 본관 입구 로비 테라조에 청동으로 제작되어 상감 처리된 원형을 캐드와 일러스트를 이용해서 재현하였습니다. 3개의 형상이 연결된 전체 문양은 왕관을 나타내고, 왼쪽부터 세계와 우주 그리고 미래를 상징합니다. 2005년 순심교육재단 주관으로 4개학교 교장 단으로 구성된 심의위원회에서 최종적으로 확정되어 중구난방으로 변형된 마크 사용을 지양하고 통일하게 되었습니다.
순심 여정의 시작
1936년 5월 왜관천주교회 소속 프랑스 태생 리처드(Richard, R.) 주임신부가 소화여자학원을 설립하였습니다. 이를 전신으로 1947년 6월에 창립된 재단법인 순심교육재단을 1955년 4월 성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인수하고 학교경영을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현재까지 순심고등학교, 순심중학교, 순심여자고등학교, 순심여자중학교로 분리 되어 명실공이 사학의 명문으로 거듭나며, ‘가톨릭 정신에 입각한 생각하는 사람, 실행하는 사람, 봉사하는 사람’의 양성을 교육목표로 한 결과, 2020년 기준으로 4만 여 명의 인재를 배출하고 있습니다.
1952년에 설립된 왜관수도원은, 성 마오로 기숙사를 경내에 운영하여, 전국에서 천주교 사제를 꿈꾸며 지원한 수많은 수재들에게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고, 순심학원을 통해 교육을 실시하였습니다. 독일과 연계된 왜관수도원은, 독일로 부터 전격적인 지원을 받아 학교에 투자하였습니다. 그 결과 훌륭하고 덕망이 높은 많은 성직자를 배출하였습니다. 파격적인 대우로 우수한 교사를 초빙하고, 1968년도에, 현재에도 손색이 없이 건재한 최신식 학교건물을 독일식으로 신축하고, 수많은 교육기자재들을 독일로 부터 지원받아, 한국이 근대화하기까지 사십여 년 동안 전국적인 시범학교가 되었습니다. 아직도 교사 벽면 여러 곳에 생생하게 남아있는 아래의 음ㆍ양각 벽화를 보면 50년을 앞질러간 선진화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분도출판사와 인쇄소 역시, 그 당시 상대적으로 월등한 기술력과 장비로 말미암아 타의 추종을 불허하여 전국적으로 명성이 자자하였습니다.
석호익의 성 마오로 기숙사 체험기
석호익(중 20, 고 17회) KT부회장(2009-2011) 1977년 제21회 행정고시 합격
겸재 정선 선생의 귀환
1961년부터 순심교육재단을 인수받아 현재까지 경영 중인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은, 한국 선교 100주년을 즈음하는 2006년에 같은 수도회인 독일 성 베네딕도회 오틸리엔 수도원이 소장하고 있던 조선시대 최고의 화가 겸재 정선 선생의 화첩(21점 포함)을 되돌려 받아 영구 소장 전시중입니다.
겸재 정선 선생의 화첩(21점 포함)은 1925년 독일 성 베네딕도회 오틸리엔 수도원 소속 독일인 신부 노르베르트 베버(Norbert Weber, 1870-1956)가 구입하였습니다.
순심 연혁
- 1936년 5월 15일 이로베르토 신부에 의해 소화여자 학원 설립
- 1945년 12월 9일 왜관성당을 중심으로 소화고등여학교 설립기성회 발족
- 1946년 5월 23일 순심여자 초급중학교 개교, 초대교장 이명우 신부 취임
- 1946년 11월 29일 순심 초급 중학교로 개칭(남ㆍ여 공학)
- 1947년 6월 25일 재단법인 순심교육재단 설립인가(초대 이사장 이명우 신부)
- 1951년 8월 31일 순심중학교로 교명 변경(9학급)
- 1952년 3월 30일 순심고등학교 설립 인가(6학급), 초대 교장 정행돈 선생 취임
- 1955년 4월 1일 중ㆍ고 분리, 고등학교는 재단법인 대구 천주교회유지재단 관할
- 1961년 7월 31일 중ㆍ고등학교 병합, 성 베네딕도 왜관수도원에서 학교경영
- 1975년 3월 1일 순심여자고등학교 분리 운영
- 1981년 10월 6일 순심고등학교 24학급 증설 인가
독립지사 정행돈 교장선생
1950년 제5대 순심중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여 재직타가 1952년 3월 순심고등학교 설립과 동시에 순심고등학교 교장을 11년간 겸임하였습니다.
1912년 8월 22일 경상북도 칠곡군 파미면(현 왜관읍 왜관리)에서 출생한 정행돈 선생은,대구고등보통학교 시절인 1931년 11월, 투철한 항일정신으로 수백 명의 재학생들로 하여금 친일 교사를 배척토록 선동하고, 그 일환으로 단식투쟁을 주도하여 퇴교 당하였고,
또한, 1932년 고향 왜관에서 이창기·이두석·박몽득과 함께 조직한 청년동지회(靑年同志會)와 독서회 명목으로 비밀결사한 성진회(惺進會)를 통하여 농촌계몽 및 한글강습 등의 항일활동으로 1938년 2월 19일 체포되었으며, 1939년 10월 25일 대구형무소로 이송되어 1941년 3월 7일 까지 구금되었다가 석방되었습니다.
1947년 6월 재단법인 순심교육재단의 설립을 도와 부 정재문과 함께 학교부지 등 재정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왜관읍 삼청리에 한센병 환자 복지시설과 결손 및 저소득층 청소년교육을 위한 명성고등공민학교를 각각 1953년과 1964년에 설립하여 교육 및 복지에 기여한 입지전적 인물입니다.
1977년 대통령표창과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수여된 선생의 유지를 받든 후손들은 20억원의 ‘애국지사 정행돈장학금'을 대구가톨릭대학교에 기탁하여 매년 선발한 50명에게 1인당 100만원씩 지급하고 있습니다.
순심교가
- 하늘에 맑게 솟은 성당의 저 종탑
- 드높은 우리 이상 나래펴 줌 이라
- 진리에 문두 드려 믿음에 살 지니
- 순심의 동산 에는 순심의 젊음
순심교가 작사 시인 구상 선생
순심학원 교가 작사자인 구상(具常)선생의 본명은 구상준(具常浚)이며 호는 운성(暈城)입니다. 1919년 서울 종로구 이화동에서 출생하였으나 함경도 원산시 근교 덕원에서 성장했습니다. 1920년 독일계 베네딕도 수도회의 교육 사업위촉으로 원산 교구에 설립한 해성학원 원장을 지낸 부친과의 동행 때문입니다.
'강의 시인’이라 불리는 구상 선생의 삶에는 늘 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유년기 원산의 적전강, 장년기에는 아름답게 구비치는 왜관의 낙동강과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 말년에는 여의도의 한강으로 이어졌습니다. 한국 현대시사에서 드물게 철학적, 사상적 바탕을 갖춘 시인으로 정평이 나있습니다. 경향신문 사장 역임으로 언론인의 길을, 중앙대학교 교수 재직으로 교육자의 길을 섭렵하였습니다.
1953년부터 구상 선생은 왜관읍 왜관리 788번지에 정착을 하고 20여 년간 머무르게 되는데. 그 이유는 6·25 전쟁 여파로 월남한 덕원수도원 수도자들이 1952년 현재의 왜관수도원으로 이주하여 자리 잡았기 때문입니다
1953년 내과 의사이자 구상 선생의 부인 서영옥 여사가 순심의원을 개원했습니다. 이때 수도원 목공소 책임자인 명용인 수사가 관수재와 순심의원 공사 감독을 하였는데. 이는 구상 선생의 삶은 성 베네딕도회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구상 선생의 집안과 왜관수도원과의 오랜 친분의 돈독정도를 가늠하게 합니다. 이러한 이유가 구상 선생이 순심학원 교가를 작사하는 계기가 된 것으로 판단됩니다.
순심교가 작곡 하대응 선생
순심학원의 교가를 작곡한 하대응 선생은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 후, 동경음악대학의 전신인 일본 동양학교 재학중 바이올린에서 성악으로 전과하여 졸업하였으며, 1936년 일본전역 음악 콩쿠르 성악 부문에서 2등 입상경력과 탁월한 편곡 능력 때문에 독보적인 존재로 주목받은 인물로서, 6·25전쟁 중 대구로 피난, 1951년부터 1953년까지 대구 남산여고 음악교사로 재직타가 1954년 효성여자대학교에 교수로 부임하여 1980년까지 재직하였습니다. 하대응 선생이 순심학원의 교가를 작곡하게 된 계기는, 확인된 바는 없지만, 대구문화예술계에서 폭넓은 교분을 가진 구상 선생의 영향으로 추측됩니다. 구상 선생은 시인 공초 오상순, 아동문학가 마해송, 걸레스님 중광 등과 같은 ‘기인’들과 깊고 두터운 친분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순심에 온 화가 이중섭
구상 선생은 "6·25전쟁 중 종군기자로 활동하다가 1·4후퇴를 전후해 대구에서 대구매일신문, 가톨릭시보, 영남일보 주필 등 언론계 요직에 있으면서, 문학의 중심부인 대구 향촌동 일대에서 피난 온 문화예술인들과 교류했습니다. 당시 가난하고 여린 대구의 예술가들과 연민의 정으로 두터운 교분의 정을 나누었습니다. 휴전 후 대구에 와있던 '거식과 몽상의 난민' 화가 이중섭을 돌본 것도 그였습니다.
화가 이중섭(李仲燮·1916~ 1956)은 구상의 시집 「응향」의 표지화를 그렸으며, 1955년 구상 선생은 이중섭을 왜관으로 초대했습니다. 이중섭은 1955년 2월 24일부터 1955년 8월 26일까지 6개월에 불과한 짧은 체류기간 동안, 순심중ㆍ고등학교에 시간 강사로 재직하면서 ‘시인 구상네 가족’ ‘왜관성당 부근’등 왜관과 관련된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감사의 표시로 순심학교에 기증한 ‘빨래터'는 수십 년 동안 순심중ㆍ고등학교 교장실에 소장 전시되다가, 1980년대 초 구상 선생의 소개로 삼성재단에 판매되고, 판매대금 1억 원은 순심교육재단의 장학기금으로 조성되어 지금까지 많은 학생들이 혜택을 받고 있습니다. 이중섭은 입원가료중인 구상 선생의 병문안을 가면서, 과일 살 돈이 없자, 작품 ‘천도복숭아’를 그려 우정의 표시로 전달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는 그의 그림처럼 정겹습니다. 이중섭이 구상 선생의 사랑채에 머물면서, 담배 각 종이 등에 습작으로 그린 그림을 문밖으로 버린 것을 보았지만, 주워서 보관하지 못해 아쉽다는 토로와 이중섭의 작품 1점이 순심학교 목공실에 방치되다가 불쏘시개로 소실되는 것을 목격했다는 확인되지 않은 채 구전되는 일화들은, 이중섭의 신화가 끝나는 날까지 아쉬움과 함께 회자될 것입니다.
순심학원 교기·휘장·교색·글씨체 등에 관한 규정
https://windcjg.blogspot.com/2017/12/sunsim-logo.html웅비순심
고건상 교장 신부님과 학교 공원화
옥의 티격으로, 학교지반 전역이 배수가 불량한 점액성 황토로 형성되었으나 그대로 방치되어 우천 시 많은 제약과 불편이 따랐습니다.
1996년 3월, 고건상 신부님의 제10대 순심고등학교 교장취임과 더불어, 학교혁신 방안으로 시작된 교내 환경개선 사업은, 동문과 학부형을 비롯한 독지가의 지원과 교직원 및 학생들의 자발적인 동참으로, 일만 여 평에 해당하는 학교전역을 잔디와 보도블록으로 포장함으로써, 최우선 과제인 실내로의 황토 유입을 완전 차단하여 학습 환경을 현저하게 개선하였습니다. 그 결과, 우천 시에 실내가 진흙탕이 되던 악순환이 말끔히 사라지고, 개교 이래 수십 년 동안 지속되던 지긋지긋한 실내외화 구분 착용이 필요 없게 되자, 학생들은 자업자득의 편의성과 성취감에 환호하였습니다. 스승의 날 등을 즈음한 학생들의 감사와 격려의 편지들은 우리 모두를 고무시킨바 있습니다.
1997년 칠곡군 최재영 군수님의 선처로 교문부터 체육관 앞까지 레미콘 포장을 하게 된 것을 물실호기로 본관 앞 운동장의 대부분을 화단과 잔디밭으로 조성하고, 통로부분은 필자의 지인인 사업가 유석종님이 지원한 보도블록으로 포장하여 친환경적인 녹색공간으로 변모시켰습니다. 열악한 재정난 때문에, 행정실 최연동, 김찬수 주사님과 체육과 임유복 선생님, 농업과 성두현 선생님께서 학생들의 운반 조력과 함께 손수 포장작업을 해주셨으며, 이에 고무된 일부 학생들은 포장작업을 자청하여 레고 놀이를 하듯이 즐거워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를 기점으로, 중학교 앞 운동장과 대운동장 상단 스탠드도 나문철 선생님께서 쾌척해주신 사비로 보도블록을 구입하여 동일한 방법으로 작업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재활용 보도블록이 확보 될 때마다 동일한 방법으로 학교 전역을 포장하였는데. 실로 엄청난 물량의 재활용 블록을 확보해 주신 김성태(학부형) 조경사님과, 5톤 트럭 수십 대 분량의 자연석과 꽃나무를 기증해 주신 이인욱 동문님께서 학교공원화 인프라 구축에 지대한 기여를 하였습니다. 곽경호 전 칠곡군의장님의 지원으로 제작된 스테인리스 벤치와 기산석재 사장님께서 희사하신 석재 벤치 또한 학교공원화 열망을 더욱 고양시켰습니다.
순심고 생명의 숲 운동
금상첨화 격으로, 2003년 NGO 환경단체인 ‘생명의 숲’ 본부의 지원으로 학교공원화 사업에 가일층 박차를 가하게 되었습니다. 중학교 앞 정원에 연못을 만들고, 학교 전역에 거의 수만 그루에 가까운 수목과 꽃나무 및 화초를 식재하여 숲을 조성하였으며, 희귀종은 인근 야산이나 지역 민가 및 수도원 등지에서 캐오거나 얻어오기도 하였습니다. 교육적인 차원에서 문학에 등장하는 수종들로 엄선하였는바, 지금도 마로니에, 모란, 보리수, 해당화 등이 잘 자라고 있을 교정이 무척이나 궁금하고 그립습니다.
김도환 동문님이 기증한 느티나무 10여 그루를 비롯하여, 수많은 동문들이 기증한 수목 및 화초들도, 학급(이정희 선생님)에서 자발적인 모금 조성으로 식재한 느티나무와 함께 영원을 노래하는 바람과 함께 잘 자라고 있을 것입니다. 부산국토관리청의 학교방음벽 설치와 안전과 편의성을 도모한 교문의 이전 및 순심230동기회(중23회ㆍ고20회, 회장 장경식)주관에 의한 교명석 건립을 정점으로 학교 공원화 사업이 종료되었지만, 계획되었던 대대적인 학원 혁신은 오직 성직자의 길에 전념하기 위한 고건상 신부님의 학교장직 사임으로 결렬되어 학교 내실화에만 전념하게 되었습니다.
세월의 추이에 따라, 우리들이 이룬 흔적들은 또다시 교체되어 사라질 것이지만, 함께한 열정과 땀으로 이룬 작은 변화의 시간들은 소중하고 아름다운 여정으로 우리들 가슴속에 영원히 간직될 것입니다. 참여한 모든 분들과 그 시절 재학중이던 숙명적인 관계로 헌신한 학생들을 향한 깊은 감사는 이글로 대신합니다.
순심230동기회
순심230 동기회(중23회ㆍ고20회, 장경식 회장)는 1997년 모교에 아마추어 무선 교신에 필요한 안테나 타워와 무선국 개국에 필요한 관련 무선장비 일체를 지원하였습니다. 그 결과 자격시험에 응시한 수백 명의 학생들이 무선사 자격증을 획득하고 국내와 국외의 무선국과 활발한 교신을 하였습니다. 아마추어 무선 햄 교신은 중계국이 필요 없이 단말기(무전장비)간 교신이 가능하여 재난 시 훌륭한 정보교환 수단이 됩니다. 또한 기숙사 앞 정원에 대형시계 타워를 건립과 수목 및 화초 지원으로 1997년부터 시작된 순심 중ㆍ고등학교 학교공원화 사업에 명실공이 선도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또한 2006년 5월 14일 제17회 순심연합총동창회 체육대회를 주관한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순심중·고등학교 교명석 건립을 추진하여 각고 끝인 이듬해 제 18회 순심연합총동창회 체육대회에 즈음 하여 제막하였고, 이는 매년 추진되는 체육대회 주관기수에게 모교 기념사업의 선례가 되었습니다.
순심의 별
장병순 동문
순심중학교 1회 졸업생으로서, 1980년도 기준 현금 1억의 쾌척으로 순심교육재단 내 ‘장병순장학금' 기금을 조성하여 장학사업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12년간 순심연합총동창회장을 역임하면서 동창회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습니다.
장영철 동문
수 천 만원 상당의 악기를 일본에서 직수입하여 순심관악부를 지원하였고, 1996년부터 8년간 순심연합총동창회장을 역임하였으며, 관세청장 및 노동부 장관 등 요직을 두루 거친 3선 국회의원으로, 뛰어난 정치역량과 함께 모교와 동창회의 위상을 고양시킨 순심중학교 4회 졸업생입니다.
신덕수 동문
순심중(8회)ㆍ고(5회)졸업. 동문주소 총람 편찬과 강력한 동문단합 지원으로 기수별 동기회 활성화를 정착시켰다. 수년간의 실무부회장 활동과 2004년 3월 부터 4년간 회장 역임으로 순심연합총동창회의 산 증인으로 회자되기도 한다. 1973년부터 2003년 순심중학교 교장으로 퇴임 직전까지 모교에 재직하면서 수많은 인재들을 양성하고 배출하여, 홍조근정 훈장을 수여받기도 하였다.
순심연합총동창장학회 나채홍 회장
순심연합총동창회 나채홍 회장은 2011년 8월 27일, 2020년까지 20억원의 장학기금을 조성할 계획으로 왜관 리베라웨딩뷔페에서 출연식을 가지고, 나채홍 회장 1억원, 곽근호 동문 5천만원, 노수열(중3회) 동문 1천만원, 윤원섭 동문 1천만원, 노정해 동문 500만원, 박은주 동문 500만원, 최정희 동문 300만원의 약정을 토대로 기금조성에 박차를 기하고 있습니다.
순심마라톤과 교사 진덕언
1995년부터 기존의 육상부를 중장거리부(마라톤부)로 재편성하고 각고의 심혈을 기울여 온 결과, 국내 3대 주요 마라톤대회인 제26회 코오롱 마라톤 대회와 제9회 전국구간마라톤대회 및 제40회 대통령기 통일역전경주대회에서 각각 우승을 하는 신화의 창출로, 2010년 한 해 동안 3관왕을 차지하여 순심고등학교를 일약 마라톤 명문교로 부상시켰습니다. 인문계 고등학교가 전국의 유명 체육고등학교를 제패한 점과 3관왕이라는 전무후무한 이벤트로 전국 스포츠계에 순심마라톤을 각인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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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심고 윤문열 골든벨 왕중왕 등극
2006년 5월, 순심개교 70주년을 즈음하여 순심여고 강당에서 진행된 327회 KBS 도전! 골든벨 칠곡 순심고 편에서, 제56대 골든벨을 울린 고등학교 1학년 윤문열(17) 군은, 같은 해 12월 9일~10일 KBS 수원 연수원 및 드라마센터에서 열린 'KBS 2006 도전! 골든벨 왕중왕전'에서, 53~60대 골든벨 주인공 8명과 경합 끝에 왕중왕으로 등극해, 용은 도처에 존재할 수 있음을 전국적으로 포효한바 있습니다.
다양한 주제에 관한 독서광인 윤군은 평소 과묵하고 항상 최 상위 성적을 유지하는 수재로 알려져 있습니다. "국경없는 의사회를 동경한다.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는 불우한 이웃들을 치료해 주고 싶다."고 인터뷰에서 밝힌 그의 소박한 꿈은, 최연소 학생으로서 왕중왕 등극에 따른 경이로움과 환호보다 더욱 거대한 감동의 파장으로 전국을 강타한 작은 순심인의 거대한 쾌거로 순심사에 길이 남을 것입니다.
동문 동정
순심연합총동창회
순심학원 산하 4개 학교(순심중학교, 순심고등학교, 순심여자고등학교, 순심여자중학교)로 구성된 순심연합총동창회는 1969년 구성된 이래로 2020년 현재 11명의 회장과 4만여 명의 동문을 배출하였으며, 2020년 3월 제29대 정재우(순심중 24회ㆍ순심고 21회)회장과 송석일 실무부회장 (순심중 31회ㆍ순심고 28회) 및 조동석 사무국장(순심중 31회ㆍ순심고 28회)으로 구성된 운영진에 의해 운영 중입니다.
역대 회장 바로가기
순심연합총동창회 체육대회
2020년 기준 5만여 명으로 구성된 순심연합총동창회는 1990년 가을 재 1회 대회를 시작으로, 매년 개교기념(5월 23일)일과 근접한 휴일을 선택하여 체육대회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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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심총동창회보
1993년 1월 순심총동창회 창간호를 발간한 후 2020년 제41호를 발간해 순심의 살아있는 역사입니다.
맥심회
맥심회는, 1960년 경 순심중ㆍ고등학교 윤정선 미술교사에 의해 시작된 순심미술부 출신 화가들이 1976년 결성한 미술 단체입니다. 매년 지역사회를 비롯한 여러 지역애서 전시회를 가지는 등, 전국적으로 왕성하게 활동 중이며, 현직 대학교수를 포함한 수십 명의 작가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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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로베르토 신부님의 꽃
일제 강점기, 취학의 기회를 잃은 이국땅의 소녀들에게 배움의 터로 마련한 사설 소화여자학원이 오늘날 거대한 사학의 명문으로 거듭 났습니다. 순심인은 물론 순심과 크고 작은 인연을 맺은 사람들은 숭고하고 거룩한 설립자의 뜻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기에, 우연한 인연으로 말미암아 수십 년 간 동행한 순심여정의 종착역에서 이 글을 남깁니다.
각급 학교 전화
에필로그
길고 지루한 글을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진정한 순심인 이거나 아니면 순심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신 분으로 판단됩니다. 순심은 우리의 뿌리입니다. 학교인근 도도한 낙동강은 영겁을 두고 순심과 함께 굽이칠 것입니다. 순심인들과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 이 글의 공유를 부탁드립니다. 네이버나 구글과 같은 사이트에 ‘순심’ 을 검색하시면 이상한 동물 사진으로 일관되어 순심의 이미지를 손상시키고 있습니다. 많은 공유로 순심에 관한 아름다운 이미지들이 사이트에 넘치도록 많은 공유를 부탁드립니다. 이점이 이글의 작성 목적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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